장한 (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한은 진나라 말기, 진승·오광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죄수들을 이끌고 봉기군의 토벌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진나라의 대장군으로서 여러 반란군을 격파하고, 조나라를 공격했으나, 항우에게 패하여 항복했다. 항우에게 옹왕으로 봉해졌으나, 한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204년 사망 - 전광
전광은 기원전 205년 제나라 왕으로 옹립되었으나 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배신과 연합을 반복하다가 한신에게 패하여 살해당했다. - 기원전 204년 사망 - 기신
기신은 초한쟁 당시 유방을 섬긴 인물로, 형양성 포위 때 유방으로 위장하여 항우에게 항복하는 척하며 유방의 탈출을 돕고 화형당했으며, 그의 충성심은 후대에 높이 평가되었고, 사기에 기록된 기신과 한서에 기록된 기성이 동일 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 진나라의 장군 - 여불위
여불위는 전국 시대 말기 위나라 출신 상인이자 진나라의 정치가로서, 자초를 왕위에 옹립하고 승상이 되었으며 《여씨춘추》 편찬과 '일자천금' 고사로 명성을 얻었으나, 몰락하여 자살했고 진시황의 친부 논란 등 복잡한 면모로 대중문화 작품에서 재해석된다. - 진나라의 장군 - 항우
항우는 초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봉기하여 서초 패왕이 되었으나, 유방과의 초한전쟁에서 패배하여 자결한 인물이다. - 십팔제후왕 - 오예
오예는 진나라 말기에 봉기하여 형산왕과 장사왕을 역임했으며, 유방을 도와 진나라와 항우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 십팔제후왕 - 전한 고제
진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워 초한쟁패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전한 고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서 민생 안정에 힘썼다.
장한 (진) | |
---|---|
기본 정보 | |
작위 | 옹왕(雍王) |
재위 기간 | 기원전 207년 – 기원전 205년 |
직업 | 군사 장군 |
사망 년도 | 기원전 205년 |
사망 장소 | 싱핑, 산시 성 |
2. 생애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각지에서 진나라에 멸망당했던 옛 제국의 왕족들이 독립을 부르짖으며 거병했다. 진 이세황제 원년 9월, 진승은 주문(주장)을 파견하여 십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 본토를 공격하게 했다. 진 조정이 혼란에 빠지자, 당시 소부 벼슬을 지내던 장한은 죄수들을 사면하여 군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고, 이세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장한을 대장군으로 삼아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이세 2년 11월, 장한은 주문을 격파하여 죽이고, 사마흔과 동예의 지원을 받아 진승을 격파했다. 또한 위왕 구를 포위하고 그를 구원하러 온 전담을 죽여 위구를 자결하게 했으며, 초군과의 전쟁에서 항량을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6][7]
이후 황하를 건너 진 이세 3년 10월에는 조를 공격했다. 조나라 수도 한단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후, 거록으로 달아난 조왕 헐과 장이를 왕리와 섭간에게 포위하게 했다. 그러나 이세 3년 11월,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구원군이 도착하여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소각은 죽고 섭간은 자결했으며, 12월에는 왕리마저 사로잡혔다.
장한은 극원에 주둔하며 항우 군과 대치했으나, 계속된 패배와 조고의 전횡으로 인해 진나라 조정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초군에 항복했다. 항우는 장한을 옹왕으로 책봉했지만, 반란을 우려하여 장한, 사마흔, 동예를 제외한 20만 명의 진나라 군대를 신안에서 생매장했다.[6][9][7]
항우가 관중 지방에 입성한 후, 한왕 원년 정월에 장한은 옹왕(雍王)에 봉해져 함양 이서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고, 폐구(廢丘)[10]에 도읍을 두었다.[9]
같은 해 8월, 한나라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진창(지금의 보계시 진창구)에서 한군을 요격했으나 패배하고 호치에서 한군에게 다시 패해 폐구성으로 달아났다. 한왕 2년, 한군은 물을 끌어들여 폐구를 공격했고, 장한은 자결했다.[9][11]
2. 1. 진나라 장군 시절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으로 주문(주장)이 이끄는 반란군이 함곡관을 돌파하여 수도 함양 부근까지 육박해 왔다. 당시 진나라 군대가 부족했기에, 장한은 시황제의 능묘에서 일하던 죄수 20만 명에게 무기를 주고 반란군에 대항하는 계책을 제안하여 스스로 그 군대를 이끌었다. 전공을 세우면 죄가 사면될 죄수들은 결사적인 병사가 되어 주문의 군대를 격파하고, 주문을 면지에서 자결하게 만들었다.[6][7] 또한 내분으로 오광을 살해한 전장, 이귀 등을 토벌하고, 등설을 격파했으며, 제왕 전담과 진승의 부하로 위의 무장인 주불을 임제에서 전사시키고, 위왕 위구를 자결하게 했다. 허에 있던 오서도 격파했다.이세황제로부터 원군으로 파견된 사마흔, 동예와 함께 진승의 본거지인 진을 공격하여, 기원전 208년에는 진나라 서쪽에서 장하의 군대를 격파하고 진승을 패주시켰다. 그 후, 반란군을 이끈 항량에 대해 장한은 거짓 패주를 계속하여 방심하게 하고, 야습을 가해 항량을 죽였다.[6][7]
2. 1. 1. 조나라와의 전투와 항복
진 이세황제 시대에, 진승과 오광이 봉기하여 진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각지에서는 진나라에 멸망당했던 옛 제국의 왕족들이 거병하여 독립을 부르짖었다. 진 이세황제 원년 9월, 진승은 진나라 본토의 목전인 희(戱)에 십만 명이 넘는 군대와 장군 주장(주문)을 파견했다. 황제가 놀라고 조정이 뒤집어지자, 당시 소부 벼슬을 지내던 장한이 죄수들을 사면해 군대를 꾸리라고 진언하자 이세황제는 대사령을 내리고 장한을 대장군으로 삼아 봉기군을 치게 했다. 이세 2년 11월에 장한은 주문을 격파해 죽였고 진나라에서는 사마흔과 동예를 보내 장한을 돕게 했다. 장한은 더 나아가서 진승을 격파하고 위왕(魏王) 위구를 단월(정월)에 포위하고 5월에 위왕 구를 구원하러 온 제왕(齊王) 전담을 죽여 위구를 자결하게 했으며, 9월에는 초군과 벌인 전쟁에서 항량을 죽이는 전과를 올린다.[6][7]이후 황하를 건너 진 이세 3년 10월에는 조 공격으로 선회했다. 마침 조나라는 장수 이량이 왕 무신을 죽여 수도 한단이 혼란에 빠졌고 조왕 헐, 장이, 진여는 신도로 달아나 어수선했다. 장한은 진여 등을 공격했다 패퇴한 이량의 항복을 받아 한단을 접수하고, 한단의 주민을 하내로 강제 이주시켰으며, 한단성을 파괴했다. 조왕 헐과 장이는 거록으로 달아났고 진여는 대로 달아났다.[8] 장한은 왕리와 섭간에게 거록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남에서 용도를 쌓아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이세 3년 11월, 초나라의 항우가 구원군을 끌고 와서 거록의 포위를 풀고 진나라 군대를 무찔러 소각을 죽이고 섭간은 자결했다. 12월, 왕리마저 사로잡혔다. 포위군이 격파당한 후에도 장한은 극원에 주둔하면서 장수 이남의 항우 군과 대치했다. 장한은 2월에 초군에게 패해 물러났고 4월에 초군이 맹렬히 공격하자 장사 사마흔을 보내 조정에 원군을 청했으나 이미 조정은 조고가 농락했고 진 이세황제는 진나라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수차 후퇴했다고 장한을 꾸짖었다. 장한은 조고에게 암살당할 뻔한 사마흔의 권유와 진여가 보낸 편지를 받고 초군을 무찌르든 아니든 조고가 장악한 진나라 조정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초군에게 항복했으며 항우에게서 옹왕으로 책봉받았지만, 항우는 반란의 불씨를 우려하여 장한, 사마흔, 동예를 제외한 투항한 진나라 군대 20만 명을 신안에서 생매장했다.[6][9][7]
2. 2. 옹왕 시절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으로 혼란한 틈을 타 진나라에 멸망당했던 옛 제국의 왕족들이 독립을 부르짖으며 거병했다. 진나라 이세황제 원년 9월, 진승은 주문을 파견하여 십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 본토를 공격하게 했다. 진나라 조정이 혼란에 빠지자, 당시 소부 벼슬을 지내던 장한은 죄수들을 사면하여 군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고, 이세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장한을 대장군으로 삼아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이세 2년 11월, 장한은 주문을 격파하여 죽이고, 사마흔과 동예의 지원을 받아 진승을 격파했다. 또한 위왕 구를 포위하고 그를 구원하러 온 전담을 죽여 위구를 자결하게 했으며, 초군과의 전쟁에서 항량을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6][7]
이후 황하를 건너 진 이세 3년 10월에는 조를 공격했다. 조나라 수도 한단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후, 거록으로 달아난 조왕 헐과 장이를 왕리와 섭간에게 포위하게 했다. 그러나 이세 3년 11월,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구원군이 도착하여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소각을 죽이고 섭간은 자결했으며, 12월에는 왕리마저 사로잡혔다.
장한은 극원에 주둔하며 항우 군과 대치했으나, 계속된 패배와 조고의 전횡으로 인해 진나라 조정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초군에 항복했다. 항우는 장한을 옹왕으로 책봉했지만, 반란을 우려하여 장한, 사마흔, 동예를 제외한 20만 명의 진나라 군대를 신안에서 생매장했다.[6][9][7]
항우가 관중 지방에 입성한 후, 한왕 원년 정월에 장한은 옹왕(雍王)에 봉해져 함양 이서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고, 폐구(廢丘)[10]에 도읍을 두었다.[9]
2. 2. 1. 삼진(三秦) 분할 통치
기원전 206년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옛 진나라 제국을 18제후국으로 나누었다. 관중 지역은 셋으로 나뉘어 장한과 그의 부관인 사마흔, 동이에게 봉토로 주어졌다. 장한은 옹왕(雍王)에 봉해졌다. 이 세 나라는 옛 진나라의 땅을 차지했기 때문에 삼진으로 불렸다.[3] 이는 한중의 유방을 견제하고, 파촉 지역에 가두려는 목적이었다.[4] 그러나 진나라 백성들은 자신들의 동족 수만 명을 죽인 초나라의 대리인으로서 삼진이 통치하는 것에 분노하며 반감을 가졌다.같은 해, 유방의 군대가 관중을 침략하여 기습 공격으로 장한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장한은 폐구(廢丘; 현재의 싱핑 시, 산시 성)로 후퇴하여 농성하며 저항했다. 그러나 기원전 205년 7월경, 한나라 군대가 폐구에 물밀듯이 들이닥치자 장한은 패배 후 자결했다.[5]
2. 2. 2. 한나라와의 전투와 최후
진 이세황제 시대에 진승과 오광이 봉기하여 진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각지에서 진나라에 멸망당했던 옛 제국의 왕족들이 거병하여 독립을 부르짖었다. 진 이세황제 원년 9월, 진승은 진나라 본토의 목전인 희(戱)에 십만 명이 넘는 군대와 장군 주장(주문)을 파견했다. 황제가 놀라고 조정이 뒤집어지자, 당시 소부 벼슬을 지내던 장한이 죄수들을 사면해 군대를 꾸리라고 진언하자 이세황제는 대사령을 내리고 장한을 대장군으로 삼아 봉기군을 치게 했다. 이세 2년 11월에 장한은 주문을 격파해 죽였고 진나라에서는 사마흔과 동예를 보내 장한을 돕게 했다. 장한은 더 나아가서 진승을 격파하고 위왕 구를 단월(정월)에 포위하고 5월에 위왕 구를 구원하러 온 전담을 죽여 위구를 자결하게 했으며, 9월에는 초군과 벌인 전쟁에서 항량을 죽이는 전과를 올린다.[6][7]이후 황하를 건너 진 이세 3년 10월에는 조 공격으로 선회했다. 마침 조나라는 장수 이량이 왕 무신을 죽여 수도 한단이 혼란에 빠졌고 조왕 헐, 장이, 진여는 신도로 달아나 어수선했다. 장한은 진여 등을 공격했다 패퇴한 이량의 항복을 받아 한단을 접수하고, 한단의 주민을 하내로 강제 이주시켰으며, 한단성을 파괴했다. 조왕 헐과 장이는 거록으로 달아났고 진여는 대로 달아났다.[8] 장한은 왕리와 섭간에게 거록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남에서 용도를 쌓아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이세 3년 11월, 초나라의 항우가 구원군을 끌고 와서 거록의 포위를 풀고 진나라 군대를 무찔러 소각을 죽이고 섭간은 자결했다. 12월, 왕리마저 사로잡혔다. 포위군이 격파당한 후에도 장한은 극원에 주둔하면서 장수 이남의 항우 군과 대치했다. 장한은 2월에 초군에게 패해 물러났고 4월에 초군이 맹렬히 공격하자 장사 사마흔을 보내 조정에 원군을 청했으나 이미 조정은 조고가 농락했고 진 이세황제는 진나라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수차 후퇴했다고 장한을 꾸짖었다. 장한은 조고에게 암살당할 뻔한 사마흔의 권유와 진여가 보낸 편지를 받고 초군을 무찌르든 아니든 조고가 장악한 진나라 조정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초군에게 항복했으며 항우에게서 옹왕으로 책봉받았지만, 항우는 반란의 불씨를 우려하여 장한, 사마흔, 동예를 제외한 투항한 진나라 군대 20만 명을 신안에서 생매장했다.[6][9][7]
항우가 관중 지방에 입성한 후, 한왕 원년 정월에 옹왕(雍王)에 봉해져, 진나라 땅을 갈라 받아 부장이었던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와 함께 관중 수비를 담당했다. 옹의 판도는 함양 이서 일대며, 폐구(廢丘)[10]에 도읍을 두었다.[9]
8월, 한나라에서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고도현의 폐쇄된 옛 도로로 나와 옹나라를 습격하자, 장한은 진창(지금의 보계시 진창구)에서 한나라 군대를 요격했으나 패배하고 달아나다 호치에서 한나라 군대에게 다시 패해 폐구성으로 달아났다. 한나라는 번쾌에게 장한이 도망친 폐구를 포위하게 하고 옹나라의 나머지 판도를 모두 정복했다. 한왕 2년, 한나라는 물을 끌어들여 폐구를 공격했다. 폐구는 항복하고 장한은 자결했다.[9][11] 한나라는 옹나라를 폐하고 지명 폐구를 괴리로 바꿨으며, 옛 옹나라의 판도에 농서군, 북지군, 중지군(후의 우부풍)을 설치하여 한나라의 군현으로 편입했다.[12]
3. 가족 관계
- 아우: 장평사기/권007|史記/卷007중국어사기/권008|史記/卷008중국어
4. 평가
와 는 사마천의 사기 권7 항우본기, 권8 고조본기를 나타내는 템플릿이므로, 원문 소스에 나타나 있지만, 현재 섹션에서 평가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으므로 제거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최종 출력은 다음과 같다:
장한에 대한 평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hiji
[2]
서적
史記索隠
[3]
서적
史記
[4]
서적
史記
[5]
서적
北京大学蔵西漢竹書(参)
[6]
서적
사기
https://zh.wikisourc[...]
[7]
서적
사기
https://zh.wikisourc[...]
[8]
서적
사기
https://zh.wikisourc[...]
[9]
서적
사기
https://zh.wikisourc[...]
[10]
문서
싱핑 시
[11]
문서
[12]
서적
한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